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에 대해서 === || [youtube(FIOIUlDB5yU)] || || 니체가 작곡한 관현악 합창곡 <삶에 대한 찬가(Hymnus an das Leben>(1887년) || [[리하르트 바그너]]가 니체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여러 면에서 결정적이다. 니체와 바그너 사이에는 여러 공통분모가 있었다. 니체는 10대 시절부터 바그너의 음악을 알고 있었고, 바그너의 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다. 오페라를 그리스 비극으로 돌려놓자고[* 바그너 이전의 주류 오페라나 [[주세페 베르디]] 등 당시 오페라는 평범(?)한 인간들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최초의 오페라가 그리스 비극의 재현을 목적으로 했다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지도..] 주장했다는 점에서 둘의 의견은 일치했다. 무엇보다도 바그너와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바그너는 1854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그의 철학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깊이 반영했다. 무식한(?) 음악쟁이가 무슨 철학이냐는 편견이 강했는지, 과거에는 바그너가 일방적으로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잘못된 견해가 일반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에 가깝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바그너보다 쇼펜하우어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니체는 바그너와 교류하기 불과 3년 전인 1865년 처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 니체는 바그너와의 토론을 통해 철학에 깊이 빠지게 되어 문헌학자로서가 아닌 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스위스 산골짜기에서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니체는 거의 매일같이 바그너 집에 놀러가 거기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바그너와 니체는 31년이나 나이차이가 났는데, 아버지 없이 자랐던 니체는 바그너 부부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정을 느꼈다고 한다. 바그너와의 토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던 니체는 1870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구상하여 저술하기 시작했고 이를 발전시켜 1872년 자신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완성하여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 본연의 정신을 살리고 있는 작곡가로 바그너를 지목한다. 하지만 이후 서서히 여러 가지 이유로 니체는 바그너의 예술에 회의를 품게 된다. 바그너 작품들 자체가 내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불일치에 대해 점차 회의를 가지고 혐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바그너가 25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여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초연을 보고 나서 바그너에 대한 회의가 심화되었다. 니벨롱의 반지는 소재적으로 니체와 접점이 매우 많은 작품이다. "신들의 멸망", 그리고 "신의 의지를 초월한 자유로운 인간"의 출현을 고대하는 바그너의 이 작품은 니체를 상징하는 "신은 죽었다", "위버멘슈"의 개념과 매우 깊이 연관된 것이다. 물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이미 1850년대 초반에 대본이 모두 완성된 상태였기에 니체가 바그너에게 영향을 받았으면 받았지, 바그너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이런 작품을 쓴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니벨룽의 반지에서 신의 의지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은 모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해석하기 따라서 바그너는 신들의 멸망 이후 신들의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세대의 인간의 출현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매우 불분명하다. 어쨌거나 니체는 지크문트와 지크프리트의 연이은 실패와 죽음, 그리고 이로 인해 결국 염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이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인 방향과 불일치하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82년 바그너의 유작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 바그너가 기독교에 굴복했다고 비판하며 그를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바그너로부터의 결별을 생각한다. 1882년 작고하기 수개월 전 [[베네치아]]에서 요양하고 있던 바그너와 그의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나 담담하게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미 그전부터 니체가 심심치 않게 바그너를 비판하는 글을 써오던 차였기 때문에 바그너도 니체와의 결별을 예상하긴 했으나, 그로부터 직접 결별을 선언받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자신의 정적들에게 언론을 통해 가차없는 독설로 비판해왔던 바그너였지만 니체에 대해서는 매독으로 정신적으로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언급한 것 이외에는 니체의 공개적인 비판에 대해서 따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한 뒤부터 1889년 전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완숙미가 넘칠 시기에 에세이 '바그너의 경우'[* 이 책에서 니체는 바그너를 비판하고 대신 오페라 '[[카르멘]]'과 그 작곡가 [[조르주 비제]]를 예찬한다.], '니체 대 바그너' 등 바그너를 공격하는 저서를 여러 권 저술했다. 이에 대해 니체가 정작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튜브로 아무 때나 수시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그너의 만년 음악극은 바그너 생전에도 상연된 적이 거의 한두 번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오늘날의 기준만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아무튼 바그너로부터 결별하며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니체 개인으로서는 뼈아픈 일이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었지만,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가치가 없었고, 그렇기에 잊혔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들도 아니고--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던 니체로서는 바그너의 말기 오페라에서 [[퍼시발|신에 대한 인정과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후 극심한 정신 분열 상태가 더욱 심해졌다. 애초부터 바그너와 친해진 연유도 일찍이 쇼펜하우어와 교제하며 그의 사상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바그너를 니체가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즉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이상 니체는 더 이상 바그너와 함께할 이유가 없었던 것. (참고 -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쇼펜하우어도 깠다. 그는 아무 희망 없는 염세주의 역시 기독교나 형이상학 못지않게 미워했다.)[* 그는 염세주의는 이루지 못한 이상주의에 파생물이라며 약자들의 도덕을 가진 인간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것이라며 극딜을 박는다. ~~[[쇼펜하우어]] : ????~~][* 쇼펜하우어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니체가 까는 정도만큼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염세주의는 아니다... 니체의 사유 체계가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 수 있는 부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